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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ies

공상왈츠

by 고이난 2021. 1. 28.

정확히 어느 년도인지 모르겠는 봄, 경복궁 앞. 유난히 도시가 잿빛으로 보이던 때였다. 401번 버스는 경복궁 앞 삼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좌회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난히 길이 막히던 때였다. 유난히 차 안의 운전자들의 짜증어린 표정과, 짜증섞인 경적이 크게 들렸던 때였다. 일찍 찾아온 더위는 교통체증으로 인해 큼지막히 횡단보도를 막고 있던 버스를 보며 푸념하는 직장인의 짜증을 더했다. 그 사람의 양복이 유난히 잿빛으로 보였다. 아마도 그 잿빛이 엎질러진 물감통이 캔버스에 번지듯 도심을 뒤엎은 걸까.

 

정확히 어느 년도인지 모르겠는 여름, 선정릉. 백일장에 시 한 편 꼴랑 내고 얼음땡을 하러 가기는 양심에 찔렸는지 평소에 들지도 않던 붓을 들고 나무와 연못을 그렸다. 어릴 적부터 나무를 좋아해서 나무를 그리고 색칠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연못에 비친 나무를 그리는 것은 도무지 쉽게 되지 않았다. 나름의 창의성으로 점수를 따고 싶었던 나는 연못에서 물을 떠와 물감통에 담아 그 물로 연못을 그렸다. 선생님에게 제출하며 최대한 어필하고자 했지만, 연못물로 그려봤자 서투른 그림일 뿐이었다. 그렇게 뒤늦은 얼음땡에 합류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다음날,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선생님에게 그림만을 받아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림에서 연못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상을 받은 것 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 때의 물감통에는, 연못물이라 하더라도 여러 물감들이 섞여 일반적인 수돗물을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잿빛 물이 담겨있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연못의 색도 잿빛과 아주 거리가 멀지는 않았다. 도대체 잿빛의 연못물은 어떻게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를 그렇게나 투명하고 맑게 비추고 있었을까? 

 

나는 물감통에서 번진 잿빛의 물이 마치 꽃과 나무를 싱싱하게 비추던 연못의 물과 다름이 없었던 것처럼, 회사원의 양복에서 번진 잿빛의 향연이 마치 사람들의 웃음과 청량한 바람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들 동시에 서류가방을 집어던지고 하나 둘 손을 잡기 시작했다. 운전자들도 모두 내려 동참했다. 크게, 작게, 하나둘 원을 그리며 천천히 강강술래를, 강강수월래를 춘다. 느릿하지만 경쾌한 3박자의 스텝으로 뱅글뱅글 돈다.

 

사람들이 그 때 선정릉 연못에 비친 꽃과 나무의 색으로 점차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공중에 뜬 그네를 타듯이 그 사이에서 너울거리며 사람들의 원 속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고인환- 공상왈츠 (5집 "모두의 시간" 수록곡)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라디오" (기대라) 시즌1, 2 엔딩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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