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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 to a shadow

꺾이지 않는 건 마음의 중요성

by 고이난 2022. 12. 4.

하도 요즘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해대니까 심술나서 제목을 저렇게 해보았다. 연희동이다.

 

오늘은 "오랜만"의 날이었다.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고, 오랜만에 요리를 하고, 오랜만에 블로그도 써보고. 미국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지못해 했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채우는 것들이었음을 깨닫고, 생각한 곳이 있었다. 연희동.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리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경복궁까지는 자주 보는 풍경이어서 익숙. 터널을 지나면서부터는 자주 봤었던 풍경이어서 익숙. "익숙함"이란 그 때와 지금 간의 거리가 아니라 그 때의 길이와 관련이 있는 감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엇다. 

 

서대문우체국 정류장에 내려 짙은의 노래를 틀었다. 

 

 

언덕길을 올라갈 때는 친구네 하숙집에 놀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늘 설렌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순간만큼은 똑같이 느낄 희한한 감정이다. 익숙한, 새로운, 풍경들이 지나 하숙집은 그대로다. 말 그대로 전전했던 식당들을 지나 나에게는 비교적 "뉴페이스"에 가까웠던 무인 독서실, 새로 생긴 코인빨래방, 편의점, PC방을 지나 나의 예전 자취방 건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나를 한 번 잃어버린 적이 있다. 작년 초와 마찬가지로, 이 블로그를 쓰게 만들었던 갖가지 일들 때문에 만큼 힘든 정도였을까. 힘듦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마주보며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었다. 예예전에도 예전만큼 힘들었으려나?

 

이곳에는 사라져서 아쉬운 것들과, 사라졌지만 눈치채지 못하는 것들과, 아직까지 남아있어 다행인 것들이 존재한다. 허나 달라진 시간축에 놓여있다. 언젠가 공간에 대한 기억은 꼭 기차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기차칸 내부는 x, y, z축이 전부 존재한다. 거기에 더해 기차칸이 항해하는 경로인 제 4의 축이 있기 때문에 기차는 시간을 달리는 공간 같은 느낌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대로"인 것은 없다. 반면에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없다. 차라리 몇 개는 새롭게 바뀐 점들이 안도감을 준다. 오랜만에 브리또를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관두었다. 

 

 

문득 눈에 띄는 집이 있다. 지나치지 않을 수 없어 꼭대기부터 1층까지 전부 훑어보았다. 이제 저기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겠지. 힘든 일이 꼭 한 가지라는 법은 없지만, 쌓아두었던 힘든 점들을 촉발시키는 사건은 있기 마련이다. 그 사건 현장에 다시 온 나는 범죄자는 반드시 사건 현장에 돌아온다는 느와르의 클리셰적인 대사를 읊는다. 이전에는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해서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내가 잘못했든 아니든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한다. 고통을 공감하지 않는 무책임한 소시민처럼, 그렇게 스스로에게 읊는다. 그만큼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서는 반대편 동네로 넘어간다. 늘 조잘거리면서 저 아래로 갔는데, 하며 횡단보도를 걷는다. 여차저차해도 이곳은 나에게 고향이다. 내가 집으로 부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가 산 적은 많았지만 정말로 "살아냈던"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박사 지원을 했고, 그 결과 4년 뒤의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모를 것들을 한없이 지켜보며, 분리수거를 하러 나왔다가 30분은 그렇게 밖에서 우두커니 서서 눈물 짓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 뒤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곳에서의 아픈 기억만큼은 나조차도 망각하고 없던 일처럼 하고 살아갔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항상 매 순간 나를 점거하는 일들이 닥쳐오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는 그 모든 일들을 온몸으로 맞서 겪어내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일이 나를 재편성하더라도. 속수무책일 뿐.

 

 

5년 동안 가족의 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늘 부탁을 드렸던 꽃집에 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미국..." 하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알아봐주신다. 내가 자주 대면으로 방문하던 곳은 아닌데. 인스타그램의 순기능이 여기서 발휘하는 것인가 싶었다. 순간 놀라웠다. 공간이 모두 바뀌어도, 같은 시간축에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그 사실을 알자마자 이곳은 어떤 지층에 묻혀진 추억팔이 공간이 아닌, 지금 나와 함께 살아숨쉬는 공간이 된다. 나는 다른 기차칸에 올라탔지만, 기차는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 거기서 내릴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아직은 내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은 시간인 것이다. 공간은 기억이고, 사람은 시간이다. 기억은 바뀌지 않지만, 사람은 계속 흘러간다. 사람이 기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에어팟을 끼고 노래를 틀었다. 이제부터는 노래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 공간의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잘라 귓바퀴에 흘려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실수하고 시도하고 좌절하고 우연히 마주친 행복에 힘겨워하며 살아나갈 테다. 

 

이 노래가 이렇게 위안이 될 줄 몰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4HbEI4Iyw 

 

한 때 나를 사랑했던 것들과

한 때 나를 지켜주던 눈빛이

한 때 나를 덥혀주던 온기와

한 때 나를 보살피던 그 집이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

무너져가는 꿈들이 되어

흩어져가는 우주의 저 먼지들처럼

다시 만날 수가 없다네

 

한 때 나를 감싸주던 공기와

한 때 나를 웃게하던 웃음이

한 때 나름 절실했던 마음과

한 때 나름 소중했던 것들이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

무너져가는 꿈들이 되어

흩어져가는 우주의 저 먼지들처럼

다시 만날 수가 없다네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

무너져가는 꿈들이 되어

흩어져가는 우리의 발자취를 기억하네

 

한 때 나를 사랑했던 것들과

한 때 나를 지켜주던 눈빛과

한 때 나를 덥혀주던 온기와

한 때 나를 보살피던 그 집이

 

사라져가는 것들이 되어

무너져가는 꿈들이 되어

흩어져가는 우리들의 저 아픔들마저

희미하게 사라져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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