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원래 같으면 2주 동안 뭐하고 지냈나... 논문 책은 얼마나 읽었나... 글은 한 자라도 쓴게 있나 하면서 위기의식을 느꼈을 텐데. 그러지 않는걸 보니 단단히 간이 부었거나 마음이 차분한 듯 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체크인 메이트는 후자 이론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한국에서의 생활 말미에 인터뷰 내용들을 정리하고 일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없는 것, 시애틀에 돌아와서는 새로운 환경 조건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것 때문에 내 일상에 정지 버튼을 누르고 어떻게 지냈나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은 그 정지 버튼을 누른 참에 드립 커피가 아닌 에스프레소를 내려서 라떼를 타 마셨다. 라떼는 말이지. 그래서 근황을 찬찬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1. 맞다. 안정감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 안의 나와 내가 그만큼 더 자주 이야기하고, 같은 것을 바라보며 느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기 때문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달리기를 하며 그렇게 성냈던 내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기를 무서워하는 내 자신이, 지금은 안으로 밖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내면 성 나는 대로, 무서우면 무서운 대로 그 모든 것이 나의 모습인 듯 하다. 나는 조금씩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터득한 듯 하다.
2. 시애틀은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고, 공부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지난 2년 동안 나는 많이 우울하고 외로웠다. 안정감 부족 떄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나와의 대화를 하는 수련,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
나와의 대화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야 내 삶에 누군가가 깊게 들어와도 내가 나만의 공간을 지키고 온전한 나로서 그들을 대할 수 있을테니. 설령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상처를 주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러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그들로부터 독립적일 것.
그러나 나에게 있어 타인의 존재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나에 대한 이러한 정보는 이번 대화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이기도 했다.
3. 시애틀에 돌아온 지금, 나의 일상에는 이곳에서의 가족과 그곳에서의 친구가 생겼다. 나에게 소중한 타인들이 생긴 것이다. 친구 이야기를 짧게 먼저 하자면 매일 같이 멀리서나마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이다.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한국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몇 번 일상을 공유하려다 실패한 경험들이 있었다. 그런 경험들로 인한 실망감과 고립감이 나를 더 우울하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다른 것 같아 많이 기대된다. 미국에 있는 다른 체크인 메이트들에 더해 나에게 온 선물이다.
내가 한국에 자주 왔다갔다 해야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하셨을 뿐더러, 가끔 나의 우울한 상태를 보며 걱정하시던 고모가 시애틀에 돌아오기 전, 나에게 감사한 제안을 해주셨다. 우선 다음 한국 방문까지 고모네에서 지내면 어떻겠냐고. 출퇴근이 조금 어렵지만, 이제 박사 수료를 앞두고 수업도 많이 들어놔서 학교에 자주 가지 않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시애틀에 없는 여름 방학 동안 어떻게든 집을 처리하느라 드는 비용도 너무 아까웠기도 했다.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모는 나를 정말 많이 챙겨주시는데, 그걸 당신의 아들도 그 파트너와 나가 살아 독립해버린 지금, 다시 나에게 되풀이하느라 힘드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가감없이 공유했고, 그 결과 서로가 원하는 조건에 맞게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것이 성사되었다. 예이-
3.1. 고모 집에서 지내는 것은 지금 너무나도 행복하다. 우선, 고모와 고모부에게 더 많은 점수를 따기 위해 애교를 떨고 있다. 그래서 애교가 늘고 있다. 서른살의 박사과정에게는 끔찍한 일이긴 하다. 우선 타국에서 가족과 지내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가 있으랴..
거기에 더해 고모부가 새로 차를 뽑으신 김에 기존에 쓰시던 차를 잠시 빌려서 쓰기로 했다. 고모부도 어차피 처분할 생각이셨다고 하는데, 내가 조금 더 갖고 있는 셈이지. 한국으로 치면 K7인데, 너무 마음에 드는 차이다. 그래서 요즘은 혼자서 인근에 드라이브도 종종 나가기도 한다.
차가 생기니 도심이 아닌 교외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먼저 크로스핏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줄곧 해보고 싶었는데, 크로스핏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으로 장을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 학교 근처에서 살 때는 짐이 무거우니까 늘 가까운 트조(트레이더조)에만 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지가 차로 인해 더 넓어지게 된 셈이다.
4. 학교 생활에 있어서도 여러 새로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우선 우리 지도교수님이 founding director로 있는 UW Center for Environmental Politics의 Graduate Chair가 되었다. 센터를 대표하는 원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센터에서 주최하는 여러 행사들이나 세미나를 기획하는 위치인데, 교수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꽤나 대단한 사람들이 선뜻 와서 발표를 하는 듯 하다. 그들과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다음으로는 우리 학교의 Clean Energy Institute에 1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시애틀에 돌아오고 난지 이틀 만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는데, 공대생들만 모여있어 주눅들기는 커녕 오히려 반가웠다. 워낙에 혼자 튀는 상황에 익숙해서인지 자기소개를 할 떄 정치학과에서 왔다고 하자 모두 뒤를 돌아볼 때 오히려 헤헹- 스러웠다. 그래 내가 이 공대밭에 깽판을 치러 온 사회과학돌이다- 마음 속으로 외쳤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기후변화 관련 공부를 하는 대학원 학생회 임원으로 선발되었다. 이것은 차후에 업데이트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쓰고 나니 이번 연도에 종합시험이며 박사논문 프로포절도 써야하는데... 뭘 이렇게 또 일을 많이 벌려놨지 싶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을 위해 한국과의 일을 줄이려고 한다. 시차도 시차지만 한국 동료들과 미국에 있을 떄 오히려 가깝게 지내면 기대하는 것들로 인한 실망을 더 하게 되는 것 같아서. 그들과는 잠시, 안녕-
5. 어쨌든 같은 해에 이렇게나 달라진 나의 일상과 모습을 보면서 참... 얼떨떨 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분과 컨디션의 최저점을 찍었던 만큼, 지금의 상태에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물이 차오르는 곳에서 겨우 누군가 나를 건져내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다음, 아직 차오르고 있는 아래 바닥을 보고 있으며 감사하다는 그런 생각이다.
아참, 자랑 아닌 자랑을 하자면... 드디어 나에게도 첫 SSCI 논문이 생겼다. Review of Policy Research 저널에서 3년 동안 집필하고 리젝당하느라 떠돌이 생활을 했던 논문을 받아준 것... (ㅠㅠ) 논문 투고 후기는 다음에 자세히 쓰면 좋을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지금 Climatic Change에 리뷰를 받고 있는 논문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이 논문은 연구의 투명성을 위해 리뷰 과정에서부터 외부에 공개하는 pre-print 절차를 밟고 있는 논문이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어서 올해 안으로 인터뷰 다녀왔던 논문들도 잘 써서 투고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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