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난 2021. 5. 6. 13:52

오랜만에 노트북을 끄고 집에서 나왔다. 잠시 혼자 두었던 분노에 찬 나를 달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 많이 바빴다. 인터뷰를 위한 IRB 서류를 작성하고, 출장서류를 작성하고, 박사논문 주제를 논의하고, 새로운 태양광 데이터를 취합해서 정리하고, 채점을 해야 했다. 세 과목의 수업을 듣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늘상 있던 리딩, 과제, 그리고 세미나는 그대로 있었다. 

 

얼마 전, 분노한 나를 여러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잠시 떼어내고 남은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오늘 채점, 출장서류, 그리고 이번주 세미나가 모두 끝나는 날이었다. 수요일은 늘 달리기를 하러 가는 날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끄고 나를 달래러 거리에 나섰다. 

 

아참, 오늘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추천서를 써주기로 했었지. 그는 좋은 학생이다. 분명 훌륭한 장교가 될 것이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쓰고 다시 노트북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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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달리기에서 무리했는지 아직도 종아리가 아파서,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원래 페이스대로 쭉 뛰었다. 500를 남겨놓고도 숨이 그렇게 벅차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일요일엔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하늘은 맑았다. 구름이 적당히 낀 날이 좋다. 뛰는 도중에 지대가 높은 곳이면 가끔 레이니어 마운틴이 보일 때가 있다. 오늘은 아쉽게도 없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유독 오늘 뛰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신을 맞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6피트 거리두기는 하면서. 심지어 단체로 나온 사람들도 다 그러더라. 정말 바이든 대통령이 흐뭇해 할 광경이다. 예전 같았으면 밖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눈쌀을 찌뿌렸을텐데. 그 백신이 뭐라고, 이렇게도 금방 인식을 바꿔버린다. 마이크를 쓰지 않고 연설 후 퇴장하는 바이든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의 취임식 때 그가 종종걸음으로 뛰면서 나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오늘 그런 모습으로 뛰는 할아버지들이 많더라.

 

오늘은 그렇게 내 안의 것들이 아닌 내 밖의 것들을 감상하며 달렸다. 잠깐 숨이 벅차오를 때 연구방법론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힘듦을 잊을까-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달리는 나의 마음은 그런 고민들을 재빠르게 지나쳤다.

 

 

다만 분노한 나와는 함께 옆에서 나란히 뛰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유독 조용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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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된 기타를 치는 동료와 함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공원에는 참 신기한 것들을 하는 사람이 많다. 태극권, 훌라우프 돌리기 (팔로), 리본체조, 혼자만의 마술쇼. 나도 이전에 검도에서 배운 것을 떠올려보며 어디서 기다란 막대기 하나 들고와서 호국검법이나 수련할까 싶더라. 아무도 신경 안 쓸텐데. 얼마 전에는 중세시대 갑옷을 입고 몽둥이와 커다란 장검을 가지고 서로 대련하는 팀도 있었다. 그 더운 땡볕에.

 

문득 명상을 할까 했다. 그런데 친구가 메시지로 노래를 추천해주길래, 에잉- 지난번 무지개를 만났던 곳까지 가면서 음악을 듣고 거기서 하자- 했다.

 

양현종 선수가 선발 데뷔전에서 3.1이닝 8탈삼진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끼는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가보았던 피자집이 멀리 보였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철이 없다. 그에게서는 오늘 유독 연락이 없다.

 

분노는 나를 묵묵히 따라와줬다. 그도 좋은 날씨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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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 좋은 곳에 벤치가 하나 있길래 앉았다. 아쉽게도 무지개는 없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발을 신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웃어른다리를 하고 앉았다. 큰 알갱이 모래 사이로 지나가는 파도 소리와도 같은 숨을 천천히 들이내쉬었다. 

 


눈을 감으니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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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래 이야기해봐.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

 

그는 말이 없었다.

 

"왜 그래? 기껏 좋은 자리 찾아서 앉았더니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뭐가?"

 

꽤나 목소리가 달라져있었다. 분노가 아닌 무기력감이려나?

 

"내가 화내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수 있는게 없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눈을 떴다. 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은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있었다. 수척해져 있었다.

 

"아니야?"

 

"뭔가를 바꾸고 싶은거야?" 

 

나는 다시 되물었다. 그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잔잔한 파도가 쏴악- 하고 한 번 거칠게 몰아치더니 자갈밭 옆에 있던 바위를 철썩- 하고 때렸다. 그 소리에 눈을 뜨고 싶었지만 나는 그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이제 다 모르겠어. 그냥 다 귀찮고 짜증나고 힘들고 우울하단 말이야."

 

왠지 모르게 그가 감정표현을 할 때마다 모습이 자꾸만 바뀌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본 장면 같은데.

 

"그냥 혼자 숨고 싶어. 다 끊어버리고."

 

"정말?"

 

나는 재빨리 물었다. 나로부터의 정적을 깨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정적은 그의 차례였다.

 

"그럼 왜 아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 않냐고 나에게 물었는지 물어봐도 돼?"

 

그의 형태는 알 수 없게 바뀌었다. 나는 잠시 정적의 균형추를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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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 있던 눈을 떴다. 몇 척의 배가 더 지나고, 산책나온 강아지들이 풀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물결은 바람따라 흐르고 있었다. 아참, 다리를 보지 못했네. 오늘도 차가 많이 지나가던가?

 

-

 

"저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거, 맞겠지?"

 

그는 내가 가장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그 모습은 내가 아는 그의 모습 중에 가장 희미한 모습이다.

 

"무엇을 바꾸고 싶은데?"

 

그는 또다시 말이 없었다.

 

"뭘 바꾸고 싶은지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그건 잘 모르겠어. 그치만 지금 상황은 너무 싫어. 지쳤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나는 뭉클해졌다. 그래, 다 이해해. 뭔가를 바꾸고 싶었던게 아니라, 그냥 지금 너는 많이 힘들구나.

 

"그렇구나."

 

나는 가만히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미안해. 힘든 것도 몰라주고. 처음에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니야."

 

그는 조금 더 뚜렷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쩌면 내가 힘든 건 새발의 피일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도 안 힘들어보이는 거라서 잘 몰랐던 걸지도."

 

나는 곧바로 힘주어 말했다.

 

"그건 절대 아니야. 힘듦에는 크기도 형태도 상관없어. 더욱 중요한건 이유도 상관없어. 힘들만한 이유란 건 없어. 그냥 힘들면 힘든거야. 그걸 남이 몰라주는 것도 너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그래도 말이라도 먼저 꺼냈어야 했는데, 그치?"

 

그는 처음 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줄지 몰라서였다.

 

그 모습은 내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야. 꼭 그렇게 생각 안해도 돼."

 

나는 이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렇지만 용기내서 해보았다. 이 말이 위로가 될까? 그는 한동안 나와 함께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눈을 떠도 그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아 그렇게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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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조금씩 지고 있었다. 바람을 느껴보았다. 2006년 겨울, 오사카에 간 것이 생각났다. 그 때 카드캡터체리 OST를 들으며 이상하리만치 상쾌한 바람으로 처음 일본을 느꼈지. 그 이후로도 나는 일본에 갈 때마다 그 느낌을 그리워하며 갔던 것 같다. 오늘 바람도 꽤 나쁘지 않았다. 처음의 그 바람보다는 아니지만.

 

아니다, 지금 바람도 좋다. 어쩌면 그 때의 경험이 있기에 시원한 바람이 부면 더 많은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지도 모른다. 첫 자취방 앞에 있었던 자그마한 다리에서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것을 보며 느꼈던 바람. 정상에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 먹고 덥힌 몸으로 나와 맞았던 고요한 스키 슬로프의 바람. 살을 에는 추운 바람에도 꼭 날아갈 것만 같았던 유배지에서의 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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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뭘 바꾸고 싶은지보다, 지금 당장 너가 원하는게 뭔지 생각해보면 어때?"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던 눈을 왼쪽 아래로 깔았다.

 

"너 말대로 지금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몰라. 근데 뭔가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바꿀 수 없는 너와 너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세상을 탓할 수 밖에 없어."

 

나는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 이어나갔다.

 

"뭔가가 바뀐 뒤에도, 너는 행복할 수 있어?"

 

그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스스로를 바꿔라-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야. 아무것도 바꾸지 말고, 지금 너 모습 그대로인 상태에서,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고 너가 정말 원하는게 뭔지를 이야기해줘.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그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깊은 한숨을 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망설이는 듯 했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답을 찾는 걸까? 아니, 어쩌면 답은 예전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걸 꺼내기가 두려울 뿐일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두렵길래? 라는 생각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고, 그걸 이야기해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건-"

 

 

 

 

잔잔하던 바람이 잠시 한 차례 거세지더니 나의 귓가를 때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바람은 잠잠해졌다.